Biyernes, Mayo 22, 2015

[박문성] 1조4천억 ‘쩐의 전쟁’ 속 한국 프리미어리거들의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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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튼 시절 에이스였던 이청용 ⓒ풋볼리즘
한국 프리미어리거들의 잔혹사가 이어지고 있다.
박지성, 이영표의 성공 전례가 이어졌고 현재도 기성용이 소속팀은 물론 프리미어리그 전체로 놓고 보더라도 눈에 띄는 뛰어난 활약을 잇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한국 선수들의 잉글랜드 무대 잔혹사가 계속되고 있다.
위건의 3부 강등이 확정됐다. 지난 주말 경기로 잉글랜드 챔피언십(2부) 이번 시즌 일정이 한 경기만을 남겨 놓은 가운데 위건은 최하위 3팀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3부로 추락했다. 위건과 함께 밀월, 블랙풀이 3부로 떨어지는 게 확정됐다.
현 에버튼 감독인 로베르토 마르티네스 감독이 이끌던 시절 끈질긴 생명력으로 ‘생존왕’이라 불렸던 위건의 급격한 추락이다. 2013년 여름 2부로 추락한지 2시즌만의 3부 강등이다. 2005년 승격 이후 숱한 위기를 넘기며 8시즌 동안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았고 2012-13시즌 FA컵 우승으로 유로파리그까지 출전했던 걸 떠올리면 수직의 낙하다.
마르티네스 감독이 떠난 뒤 오언 코일, 우베 뢰슬러, 말키 맥카이 감독에 이어 올 시즌 막판에는 지난해까지 위건에서 중앙 수비수로 뛴 1982년생의 젊은 감독 게리 콜드웰까지 소방수로 긴급 투입했지만 3부 추락이라는 최악의 상황은 면치 못했다. 위건으로선 스완지가 선수에서 막 은퇴한 게리 멍크를 감독직에 앉혀 위기를 극복한 걸 기대했지만 결과는 뜻대로 되지 않았다. 시즌 막판엔 원정 응원단에게 지원금까지 보태주며 최대한 힘을 모아보려 했지만 한 번 기운 흐름은 좀처럼 뒤바뀌지 않았다.
4시즌 연속 한국 선수 강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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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의 김보경 ⓒgettyimages/멀티비츠
위건엔 김보경 선수가 뛰고 있다. 위건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급하게 지휘봉을 잡은 맥카이 감독이 올 초 김보경을 위건 선수로 영입했다. 이전 카디프에서의 인연이 끈이 됐다. 카디프와 계약을 정리했던 김보경은 위건으로 건너와 지난 2월7일 위건 데뷔전을 치렀다. 김보경은 이후 17경기 연속 출전하며 반전의 기회를 잡는 듯했다. 최근 14경기 연속 90분 풀타임 출전 등 팀 내 입지는 확고했다. 하지만 위건이 3부로 추락하면서 빛이 바랬다. 물론 김보경과 위건의 계약은 이번 시즌 종료까지의 단기 계약이다. 이번 시즌 후반기 활약을 바탕으로 새로운 모색에 나서야 하는 김보경이다.
김보경의 소속팀 강등으로 잉글랜드 프로리그에서 뛰는 한국 선수들이 4시즌 연속해서 하부리그로 추락하는 흐름이 이어졌다. 프리미어리그에 진입하기만 하면 모든 걸 다 이룬 것만 같던 시절이 있었는데 사정이 역전된 것이다. 한국 선수 잉글랜드 무대 잔혹사의 시작은 2012년 여름 이청용의 볼튼이었다. 톰 밀러의 말도 되지 않는 거친 태클로 다리 골절상을 입고 오랜 시간 재활을 한 이청용 선수가 시즌 막판 2경기를 교체로 뛴 시즌이다. 볼튼은 이반 클라스니치와 케빈 데이비스 등을 앞세워 이청용, 스튜어트 홀든 등 큰 부상으로 장기 결장한 주축 선수들의 공백을 메우려 했지만 수비가 특히 무너지면서 2부로 강등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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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수들의 잉글랜드 무대 강등 사례
이듬해에는 박지성과 윤석영의 QPR이 강등됐다. 이때는 박지성과 윤석영 모두 개인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시즌이 아니었다. 그 전 시즌 2부에서 1부로 승격해 17위로 간신히 잔류에 성공했던 QPR의 전력은 상대적으로 허약했고 아델 타랍으로 상징되는 팀 조직력은 심각했다. 감독과 선수단 사이에 내분설까지 일면서 안에서부터 무너졌던 QPR이었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이적해 주장 직을 맡았으나 한국까지 날아와 박지성의 이적을 설득했던 마크 휴즈 감독 해임 이후 자리를 잡지 못했으며 시즌 중 이적한 윤석영은 적응 문제 등으로 1경기도 뛰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곤 지난해 여름 김보경의 카디프 시티의 강등에 이어 이번 또다시 위건까지 4년 연속해서 한국 선수의 소속팀이 잉글랜드 무대에서 강등 당하는 잔혹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올 여름 강등 잔혹사가 아직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다. 살아남아야겠지만, 윤석영의 QPR도 현재 강등 위기에 놓여 있다. QPR은 프리미어리그 4경기를 남겨 놓은 가운데 승점 27점으로 19위에 위치해 있다. 프리미어리그에 잔류하기 위해서는 17위 이상 순위에 올라야 한다. QPR은 17위 레스터 시티와 승점 4점 차다. 한 경기 차라 잔류 가능성은 여전하지만 리버풀(원정) 맨시티(원정) 뉴캐슬(홈) 레스터(원정) 등 잔여 일정이 만만치 않다. 특히 38라운드 최종전 레스터 시티전이 양 팀의 운명을 가를 인생 승부가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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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선수들의 잉글랜드 무대 승격 사례
EPL 이번 시즌 영입 자금만 1조 4376억 원
물론 잉글랜드에 진출했던 한국 선수들이 강등이란 고된 행보만을 이은 것은 아니다. 김두현과 김보경, 윤석영은 각각 WBA와 카디프, QPR 소속으로 2부에서 1부로의 승격을 경험했다. 설기현과 이청용은 각각 울버햄튼과 볼튼에서 레딩과 크리스털 팰리스로 이적해 챔피언십에서 프리미어리그로 활약 무대를 옮기기도 했다.
강등과 승격의 이유와 원인은 제각각이다. 개인과 팀마다 사정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강등됐다면 개인과 팀 어디서건 문제가 번진 결과다. 하지만 또 분명한 건 점차 격화하고 있는 잉글랜드 무대의 경쟁 구도다. 살아남는 게 시간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프리미어리거가 됐다고 해서 한순간도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경쟁의 격화다. 그 만큼 많은 선수들이 프리미어리그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어제의 프리미어리거가 오늘 2부 리그나 여타의 리그로 밀려 떠나는 건 일상의 다반사가 됐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외부 전력의 계속된 가세가 큰 원인이다. 영국을 제외한 여타의 땅에서 많은 재능들이 잉글랜드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선수 개인과 팀 간의 경쟁이 격화되고 있다. 프리미어리그 순위와 승강 싸움은 역대 최고 강도다. 빅4라는 말 자체가 이미 화석화된 표현으로 전략한 프리미어리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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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전력의 가세가 그 만큼 폭발적이다. 프리미어리그 내 잉글랜드 선수들의 입지는 크게 줄었다.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 중인 잉글랜드 선수들의 비중은 30% 안팎이다. 비 잉글랜드 선수들의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잉글랜드 축구협회가 프리미어리그 선수 등록 규정을 손질해 잉글랜드 출신 선수들에게 기회를 확대해주려는 배경이기도 하다. 프리미어리그 내 외국인 선수들의 비중이 확대됐다고 해서 외부 전력들에게 마냥 기회가 확대됐다고 만도 할 수 없다. 그만큼 경쟁이 엄청나게 확대된 프리미어리그다. 여타 유럽은 물론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 등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재능들이 프리미어리그로 모여들면서 EPL의 진입 장벽과 그 안에서 살아남고 올라서는 싸움이 점입가경이다.
박지성, 기성용, 손흥민의 돌아가는 길
프리미어리그의 전 세계 재능의 유입 규모는 구체적 수치를 통해 확인 가능한 일이다. 유럽 축구 리그 중 2014-15시즌 여름과 겨울 이적 시장에서 가장 많은 돈을 푼 곳이 프리미어리그다. 프리미어리그는 무려 12억1000만 유로라는 천문학적인 돈 보따리를 올 시즌 이적 시장에 쏟아 부었다. 한 시즌에만 선수 영입하는 데 쓴 돈이 우리 돈으로 1조 4376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다. 국가 예산 지표에서나 본 듯한 규모다. 프리미어리그 다음으로 많은 돈을 이적 시장에 쏟아 부은 리그는 스페인의 라 리가로 5억4943만 유로를 썼다. 프리미어리그와 라 리가의 차이는 두 배를 넘는다. 프리미어리그가 선수 영입 자금으로 얼마나 큰돈을 쏟아 부었는지를 알 수 있는 지표다. 참고로 다음 순위는 이탈리아 세리에A, 독일 분데스리가, 프랑스 리그 1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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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는 길 택한 전설 박지성 ⓒgettyimages/멀티비츠
이적 시장의 확장은 EPL에 진입하려는 선수들에겐 기회의 확대인 동시에 위기의 심화다. 이적 시장에 돈이 많이 풀린 만큼 진입의 문도 넓겠지만 그만큼 들어가려는 규모도 만만치 않을 수밖에 없다. 진입했다고 해도 뒤이어 계속해서 치고 들어오려는 경쟁자들 때문에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만만한 일이 아니다. 진입의 문이 넓어진 만큼 뒤로 밀려 나가는 퇴로 또한 넓어질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한 시즌에만 선수 영입하려고 1조 4천억 원 이상을 쏟아 부는 곳에서의 생존 경쟁이란. 프리미어리그에 진입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 또한 결코 만만치 않은 생존의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도전자의 위치인 한국 선수들에게 특히 더한 시대의 흐름일 수밖에 없다. 새삼 맨유라는 세계적 클럽에서 7시즌을 활약한 박지성의 존재감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는 대목인데 가속화하고 있는 프리미어리그의 이적 시장 확대 흐름을 볼 때 한국 선수들의 생존 싸움은 진입 못지않게 더 힘든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수치로만 보자면, 한 해만 1조 4천억 시장에서의 싸움인 것이다. 때문에 당장 유럽 무대 진출만을 바라보며 앞만 보고 달려 나가는 건 점차 더 위험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뿐만이 아니더라도 유럽의 어느 리그를 목표하건 간에 차분히 돌아가는 것도 이젠 분명한 하나의 길이다. 박지성과 기성용이 유럽의 중소리그를 거치거나 손흥민처럼 유럽의 유스 팀을 밟는 것과 같은, 돌아가는 길이다.

[서호정의 킥오프] 토요일 오후 4시, 닥공이 예능을 이길 때

기사입력 2015-05-22 10:49

[서호정의 킥오프] 김진현, “No.1 골키퍼? 난 아직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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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소의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김진현 (사진=킥오프)
:: J리그 기행 (2) 오사카에서 만난 수호신 김진현김진현은 아시안컵을 통해 대한민국 축구국가대표팀의 새로운 수호신으로 올라섰다. 브라질월드컵 이후 대표팀이 재편되는 과정에서 온 기회를 잘 살려낸 김진현은 처음 대표팀에 승선한 지 5년 만에 드디어 주전 골키퍼를 의미하는 등번호 1번을 확실히 부여 받았다. 김진현은 자신의 주 무대인 일본의 오사카에서도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지난 4월 29일 나가이 공원 내 긴쵸 스타디움에서 열린 세레소 오사카(이하 세레소)와 교토 상가의 경기를 관전하는 내내 김진현에 대한 현지 팬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세레소의 홈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김진현의 등번호 21번 유니폼을 입은 팬들을 찾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를 위한 세레소 서포터즈의 응원가는 일반석의 관중들도 쉽게 따라 할 정도였다.
일본으로 넘어와 보낸 7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가 이 팀에서 어떤 신뢰를 쌓아왔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물 설고 낯 설며, 말조차 통하지 않았을 외지에서 프로 선수로 성장했고, 드디어 대표팀의 No.1 자리에 올라서기까지 김진현의 역사는 한편의 드라마 같았다. 많은 것을 이뤄낸 2015년이지만 김진현은 여전히 겸손했다. 오사카 외곽의 인공섬 마이시마에 위치한 세레소의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그는 “아시안컵 이후 축구에 대한 고민이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등에 있는 번호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한 선수고 대표팀 내의 경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라며 생존을 위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온 선수다운 냉정함을 보였다.
인터뷰 후 자신의 차로 시내까지 데려다 준 김진현은 네비게이션의 도움이 없어도 오사카 시내에서 차가 막히지 않는 좁은 길로 수월하게 갈 수 있는, 현지에 완벽하게 적응된 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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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은 팀의 2부 리그 강등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고 잔류했다 (사진=세레소오사카)
김진현은 왜 J2를 떠나지 않았나?아시안컵이 끝난 후 김진현의 진가가 재평가 받으면서 한국에서 나온 가장 많은 이야기는 ‘J2에서 계속 뛸 것인가?’였다. 김진현의 소속팀 세레소는 2014년에 디에고 포를란이라는 세계적인 선수를 영입하고도 J1에서 7승 10무 17패를 기록, 리그 17위로 결국 강등되고 말았다. 이미 J리그 내에서도 최정상급 골키퍼라는 평가를 받고 있던 터였고 국가대표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진현이 세레소를 떠날 것인가에 모두의 관심이 몰렸다. 그러나 김진현은 세레소에 남았고 현재 2부 리그에서 팀의 승격을 위해 분전 중이다. 세레소가 다시 승격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팀이긴 하지만 한국의 팬들은 2부 리그에서 뛰고 있는 대표팀 주전 골키퍼의 모습에 의문이 큰 듯 하다.
Q. 교토전 무실점 승리를 축하합니다. 올 시즌 처음 무실점으로 승리한 경기라고 들었어요.A.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었죠. 지금 세레소가 J2에서는 가장 공격력이 좋으니까 많은 골을 넣어서 이기긴 해도 실점을 하니까 저는 수비수들은 아쉬움이 컸어요. 1주일 전에 연습을 하면서 수비수들을 모아서 얘기를 했어요. ‘뭐가 부족한지는 우리가 제일 잘 안다. 많은 이야기는 하지 말고 집중력만 갖자. 그것 하나만 생각하자’고. 수비수들이 도와주면 마지막에 막는 건 내가 할 몫이니까 그건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어요. 마침 교토전에서 바랐던 결과가 나와서 기뻤습니다.
Q. 2013년에 4위를 하고 관중수도 계속 늘어나면서 2014년의 세레소는 뭔가 결실을 맺겠다 싶었는데 강등이라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당황스러운 결과였을텐데요?A. 강등이 결정됐을 때 이게 사실인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가 이게 맞냐는 생각을 했죠. 2013시즌에는 좋은 성적을 거둬 챔피언스리그도 나갔고 어느 때보다 더 기대를 했던 시즌이었어요. 사상 첫 우승도 목표로 했던 시즌에 오히려 강등을 당하니까 너무 충격이었어요. 분명 팀에는 J리그에서도 손 꼽히는 좋은 선수들이 있었고, 이름값 있는 포를란 같은 선수도 왔는데 전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저도 실망감이 컸어요.
Q. 게다가 라이벌인 감바 오사카는 3관왕까지 했으니까 더 박탈감이 컸을 것 같아요.A. 감바가 성과를 내는 걸 지켜 보며 부러워 할 여유조차 없었어요. 우리는 밑에 있는 상황이고, 어떻게든 잔류를 해야 했으니까 위에서 누가 우승하고 몇위를 하고 그런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정말 생존의 시간이었어요. 시즌이 끝나고 보니까 감바의 성과를 알게 됐죠. 오사카 더비는 굉장히 살벌해요. 비겨도 양팀 모두가 욕을 먹는 경기에요. 지면 야유도 엄청나고. 일단 부럽지만 (오)재석이한테는 축하한다고 얘기해줬어요. 재석이에게는 큰 경험이 됐을 거에요.
Q. 세레소는 개인의 능력으로 따지면 J리그에서도 상위권이잖아요. 좋은 외국인 선수, 전현 국가대표, 유스가 배출한 선수들까지. 대체 무엇 때문에 강등이 된 건가요?A. 리더의 부재가 문제였던 것 같아요. 유능하지만 아직은 어린 선수들 위주로 모여 있으니까 재능의 한계를 깨지 못한 거죠. 그게 아직까지 한번도 우승을 못하는 이유인 것 같기도 해요. 분명 좋은 팀이고, 개인 능력이 뛰어난데… 가령 3위권에서 경쟁하다가 선두권으로 가려면 한 단계를 넘어서야 올라가는데 거기서 늘 걸려 넘어져요. 감바의 엔도 야스히토 같은 선수가 없어요. 강등권 싸움에서도 끌어주는 힘이 없으니까 자꾸 팀은 침체되죠. 일본은 워낙 개인이 배려하는 나라라서 그런 분함에 대해 서로 말은 안 하지만 각자는 스트레스를 받고.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에 눌렸어요. 그걸 극복하지 못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해요.
Q. 팀 내에서의 연차나 나이, 능력을 보면 김진현 선수 그런 리더 역할을 해줄 수도 있지 않나요?A. 저는 외국인 선수잖아요. 아무리 언어가 되도 외국인으로서의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들의 인생이나 선택, 방식에 대해 뭐라 하는 건 금기에요. 일본은 개인주의가 강하니까 서로를 터치하지 않고 믿고 가는 수 밖에 없고요. 거기에 껴서 뭐라고 하기가 어려워요. 할 순 있겠지만 다른 선수들은 건방지다고 받아들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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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소에서 김진현은 주장인 야마구치 호타루, 세계적 스타인 디에고 포를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비중을 지녔다 (사진=킥오프)
Q. 많은 팬들이 궁금해 합니다. 왜 2부 리그로 강등이 됐는데도 남은 거죠?A. 물론 떠날 수도 있어요. 실제로 강등이 되면 떠나는 선수들도 있고요. 저는 제가 그 결과에 납득을 하지 못했고, 지난 시즌의 경기력을 냉정히 평가했을 때 저한테도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작년까지 6년을 함께 했던 팀이니까 애정이나 의리의 문제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선수로서 제가 부족했던 것을 채우고, 문제를 해소하고 싶었어요. 2부 리그라는 표면적 문제 때문에 경기력 유지를 우려하시는 분이 많을 텐데 일단 경기 수가 굉장히 많기 때문에 1부 리그 이상으로 어려운 곳입니다. 일주일에 두 경기씩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컨디션 관리도 더 철저해야 하고요. 포를란이나 카카우 같은 선수도 여기 있기 때문에 경기력 수준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보진 않아요. 대신 빨리 승격을 해야겠죠. 세레소는 지금까지 단 한번도 우승 타이틀이 없었어요. J1은 물론이고 J2도요. 팀 역사의 첫 우승 타이틀을 안기고 싶어요. 무엇보다 플레이오프로 가게 되면 굉장히 힘드니까 격전을 치르기보다는 편하게 1위로 올라가는 게 목표에요.
일본에서의 7년, 세레소의 주역이 되기까지김진현은 동국대에 재학 중이던 2008년 말 세레소에 입단했다. 이미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대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고, 대학 무대에서도 최고의 기량을 뽐냈다. K리그의 많은 팀들이 주목했던 선수였기에 그의 J리그 행은 의외였다. 한국처럼 일본 역시 골키퍼 포지션은 자국 선수를 선호한다. 그런 상황에서 유럽이나 남미 출신도 아닌 선수가 J리그의 주전 골키퍼로서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일본 내에서도 유례 없는 일이었다. 김진현은 단지 운동장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피나는 노력을 했고, 그 결과 J리그에 가장 이상적으로 적응한 선수가 됐다.
Q. 해외에서 뛰는 국가대표 골키퍼는 김진현 선수가 처음인데, J리그로 온 이유가 궁금합니다. A. 이유는 없었어요. 사실 K리그 드래프트 참가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어느 팀으로 갈 지 기대도 했고, 내가 프로의 지명을 받을 수는 있을까 하는 압박감에 긴장도 됐던 시기인데 2008년에 학교에서 안 좋은 상황이 있어 대회를 못 나갔어요. 때마침 에이전트가 경기도 못 나가니까 경험 차원에서 J리그 팀 연습에 참가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했어요. 훈련도 하고 경기 감각도 쌓으려고 가벼운 마음으로 왔고, 그 팀이 세레소였어요. 그런데 당시 팀을 맡고 있던 레비 쿨피 감독님이 훈련 자세나 기량을 좋게 봤는지 바로 계약을 하자고 했어요. 일본은 일반적으로 전력강화부장이 선수 영입을 결정해야 하는데 제 경우에는 감독님이 바로 계약하라고 했어요. 지금 돌아 보면 외국인 감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일본은 외국인 선수에 대한 골키퍼 금지 조항은 없지만 암묵적으로 골키퍼를 외국인을 쓸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요. 한국인 골키퍼는 처음이었을 테니 내부에서는 반발도 있었을 텐데 쿨피 감독님이 확신을 갖고 저를 데려왔어요.
Q. 아무리 가까운 나라지만 일본은 엄연히 외국이더라고요. 많은 부분이 한국과는 다른데 처음엔 어떻게 적응을 해 나갔나요?A. 정말 어려웠어요. 일단 말이 안 통하니까 뭘 할 수가 없었어요. 어디 나가기가 무서웠죠. 처음엔 숙소 생활을 하는데 말이 안 되니까 쉬는 시간에 뭘 하는데 불가능해서 계속 방에만 있었어요. 가장 좋아하는 축구를 프로 선수가 돼 하고 있었으니까 삶에서의 힘든 부분은 적었지만 언어가 역시 문제더라고요. 소통을 하고 싶고 장난치는 것도 좋아하는데 그게 안되니까. 또 운동장에서 더 좋은 걸 보여주려면 서로를 이해해야 하는데 제가 직접 못하니까 믿음도 확실치 않았을 거고. 그걸 해소하는데 6개월이 걸렸어요. 정말 열심히 일본어 공부를 했거든요. 대화가 가능해지니까 선수들이 벽 없이 대해줬고 그런 문제를 빨리 극복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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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레소의 홈 경기를 가면 김진현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팬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사진=킥오프)
Q. 경기장에서도 그렇고, 클럽하우스에서도 그렇고 세레소의 어떤 선수보다 인기가 많더라고요.A. 팬들이 만족할 만한 경기를 하려고 노력한 결과라고 생각해요. 인터뷰에서도 팬들을 위한 얘길 많이 하거든요. 그러니까 자동적으로 제 마음을 알아주더라고요. 운동장 안에서의 노력도 인정을 받는 것 같아요. 여기 팬들은 클럽하우스와 연습장에도 정말 많이 찾아오거든요. 작년 같은 경우는 가키타니 선수가 인기가 많아서 천명 정도가 왔는데 저 같은 경우 늘 마지막에 훈련을 마치고 늦게 집에 가는 걸 보고 소문이 나서 좋아해주는 것 같아요. 무엇보다 강등됐는데도 팀에 잔류하니까 팬들이 인정을 해준 거 같아요. 김진현은 그냥 스쳐가는 외국인 선수가 아니고 정말 이 팀을 좋아하는 선수라는 식으로.
Q. 언젠가는 K리그에서 뛰겠다는 얘기를 전부터 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J리그에서 이뤄놓은 것을 보니 쉽게 포기하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A. K리그에 정말 가고는 싶죠. 저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꿈의 무대였거든요. K리그를 보고 자랐고, 거기서 뛰는 게 멋있다는 생각을 했고, 그건 변함이 없어요. 어린 시절부터 선수로서 노력을 해서 마지막에 그 무대에 서는 선수는 정말 적거든요. 당장이라도 갈 수만 있다면 가고는 싶죠. 그런데 여기서도 해야 할 게 남아 있고, 갑자기 떠나는 건 말도 안 되니까요. J2라는 데 팀이 떨어진 상태에서 제게도 가장 큰 책임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일단은 세레소를 1부 리그로 복귀시킨 다음에 생각해 볼 문제인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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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현은 아시안컵을 통해 대표팀을 주전 골키퍼로 거듭났지만 정작 자신은 여전히 No.1이 아니라며 자세를 낮춘다 (사진=대한축구협회)
이젠 국가대표 No.1? 아직 한참 멀었다아시안컵이 끝나고 지난 3월 열린 A매치 2연전에서 김진현은 등번호 1번을 달았다. 지난해 월드컵 이후 신태용 감독대행이 팀을 이끌 때도 김진현의 등번호는 1번이었지만 이번엔 의미가 남달랐다. 아시안컵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았고, 이제는 김승규, 정성룡 등 경쟁자보다 한발 앞서 있음을 공인 받은 셈이다. 그러나 김진현은 그 번호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Q. 아시안컵이 끝나고 다시 대표팀이 소집됐을 때 등번호 1번을 받았습니다. 감격적이었나요?A. 아니요. 번호는 단지 등에 붙어 있는 스티커라고 생각해요. 물론 축구에서 9번, 10번, 11번 같은 경우 팀의 에이스라고 해도 좋은, 뛰어난 기량의 선수가 받는 거지만 제 경우는 다른 거 같아요. 세레소에서 분명 주전이지만 제가 달고 있는 번호는 21번이거든요. 번호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좋은 것을 보여줘 인정받느냐의 문제 같아요. 실제로 저는 아직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에 대한 불만족이기도 하고요. 아직 해야 할 게 더 많고 발전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Q. 겸손함인가요?
A. 아직까지 실감이 안 나요. 솔직히 저보다 승규가 잘하는 거 같아요. 성룡이 형도 저보다 좋은 선수고요. 물론 전 항상 대표팀의 No.1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어요. 지금도 여전히 No.1이고 싶어요. 하지만 지금은 확실한 No.1은 아닌 거 같아요. 등번호를 그렇게 달고 있어도 정말 내 것인지, 저 자리가 내 자리가 맞냐는 불안감도 있고요.
Q. 아시안컵을 취재하면서 김진현이란 선수는 늘 고민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더 좋은 경기를 위해 고민을 하고, 모험적인 것도 시도하고.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사실 골키퍼는 수동적이고, 안정적이어야 하는 포지션인데 왜 늘 고민하고 있나요?A. 처음 대표팀에 들어갔을 때 그런 얘길 들었어요. 골키퍼는 모험을 하면 안 된다, 하지 말라고. 맞는 말이죠. 골키퍼라는 포지션은 실수를 하게 되면 바로 실점으로 연결되니까. 세레소에서도 그렇지만 늘 해온 게 그런 플레이 스타일이에요. 그걸 바꾸려고 하니까 어려움도 있고 그러다 보니 대표팀에 가면 약간 위축되는 면이 있어요. 머리 속으로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으니까. 그 찰나의 순간이 판단미스와 실수로 나오는 경우가 있어요. 0.1초가 중요한 상황인데, 다른 생각을 하면 늘 실수를 하게 되더라고요.
Q. 실제로 김진현은 좋은 골키퍼지만 가끔 큰 실수를 한다는 게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최근에도 A매치나 아시안컵에서 위험한 장면들이 나왔었고. A. 저도 그럴 경우 실수가 크다는 걸 아니까 대표팀 엠블럼을 달고는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확실하지 않으면 안 해야 한다.’ 실은 지금도 할 지 말지를 많이 고민해요. 좀 더 순간 집중력을 갖고 판단을 잘 하면 더 완벽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대표팀에서는 그런 고민도 자제해야 할 거 같아요. 슈틸리케 감독님도 안전하게 가는 걸 원하니까 한번씩 지적을 해주세요. 김봉수 코치님에게도 팀이 무너질 수 있는 행동이라고 혼도 나고. 그런데 세레소에 오면 그걸 또 기다릴 수 없거든요. 세레소 선수들은 저의 그런 부분을 인식해줘요. ‘라인을 끌어 올리다가 뒷공간이 뚫려도 진현이가 나와서 커버를 해준다’고 믿고 있으니까. 대표팀은 짧은 시간 안에 뭘 만들어야 하니까 그런 믿음이 아직 부족할 수 밖에 없죠.
Q. 그런데 실수를 하면 너무 쿨하게 인정하고, 뭘 잘못했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하더라고요. 조용히 넘어가는 게 본인에게 좋을 때도 있는데.A. 실수한거니까 인정해야죠. 이미 벌어진 상황이고, 해선 안 될 실수였다면 인정하는 게 제가 고칠 수 있는 길이라고 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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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에서 종종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는 김진현, 그 실수는 더 좋은 축구를 하고 싶다는 고민에서 비롯된다 (사진=대한축구협회)
Q. 아시안컵이 끝나고 3개월이 지났는데 그 시간을 돌아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A. 도전적으로, 적극적으로 경기를 하다가 실수가 많았는데 그게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책임감 부족으로 비쳤나 봐요. 대회가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 플레이스타일이 정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좀 더 정확한 플레이를, 공 하나까지 신중하게 대해야겠구나 싶었죠. 책임감이라는 단어가 제겐 가장 크게 다가온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대표팀의 후보 골키퍼일 때는 뛰고 싶다는 간절함이 컸는데 그 다음엔 책임감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걸 극복해야 진정한 주전 골키퍼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최선을 다한다김진현은 지난해 축구 선수로서 가장 큰 소원인 월드컵 출전을 눈 앞에서 놓쳤다. 패배감도 있었지만 교훈도 얻었다. 그리고 다음 4년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그는 어느 때보다 좋은 페이스로 경쟁에서 앞서 나가고 있다. 하지만 김진현의 눈은 2018년의 러시아로 향하지 않는다. 그의 눈이 향하는 곳은 오늘, 지금 당장이다. 당장 오늘부터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이 원하는 방향대로 미래를 갈 수 있다는 게 2015년 현재 김진현이 담아 준 가장 큰 생각이다.
Q. 아시안컵을 통해 러시아 월드컵으로 가는 유리한 고지를 점했습니다.A. 아시안컵이 끝나고 월드컵을 생각하지 않았어요. 눈 앞에서 월드컵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놓쳐 봤으니까 알게 된 거 같아요. 경기를 뛰든 못 뛰든 브라질 월드컵에 갈 수도 있었는데 결국 그러지 못한 건 멀리 바라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꼭 가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너무 강하다 보니 마음은 벌써 브라질에 가 있었던 거죠. 그러다 보니 경기력이 떨어졌고, 집중력도 안 좋아지더라고요. 중요한 경험을 한 거죠. 하나씩 눈 앞에 있는 당장의 훈련과 경기에서 신중하게, 책임감 있게 행동하면 그 자리는 언젠가는 올 거라고 믿어요. 그 믿음을 갖고 내일이 아니라 오늘에 충실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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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자신은 김승규, 정성룡과 함께 경쟁 중이라고 말하는 김진현 (사진=대한축구협회)
Q. 일본이긴 하지만 해외에서 살아 남았기 때문에 골키퍼로서 유럽으로도 진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얘기도 많은데, 유럽 진출 의지도 있나요?A. 물론 도전하고 싶어요. 나이를 고려해 볼 때 축구 인생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을 도전이라는 건 솔직히 올해와 내년 중에 끝내야 할 거 같아요. 그런데 자칫 그런 도전을 택했다가 잘못돼 월드컵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신중해야죠. 월드컵에 나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꼭 나가고 싶으니까요. 앞으로도 몇번 더 월드컵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실패하더라고 도전하겠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까지 고려해야 하는 나이가 됐어요.
Q. 항상 무언가를 더 채우고 싶어 하는 거 같아요. 100점짜리 골키퍼가 되고 싶어하는 것처럼. 대체 언제 100점이 채워질까요?A. 축구 선수로서, 골키퍼로서 100점이 되려면 월드컵 우승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요. 선수 생활 마지막까지,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100점을 위해 도전하고 싶어요. 마지막에 몇 점으로 평가 받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100점을 향해 노력했다는 과정이 중요한 거 같아요. 그래야 간절함을 놓지 않을 테니까.
Q. 그러면 지금의 김진현은 몇 점입니까? 
A. 저는 제 자신이 한참 아쉬워요. 아시안컵이 끝나고 10점 만점에 2점, 3점짜리 선수라고 얘기했는데 그 생각은 변함 없고요. 선수로서 해야 할 게 너무 많고, 하나씩 다 해보고 싶어요. 자기 만족을 계속 이뤄가는 거죠. 선수로서의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에 만족하고 싶어요. 그게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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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완벽한 골키퍼가 되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는 김진현 (사진=킥오프)
오사카(일본)=서호정 기자

[서호정의 킥오프] J리그 감바 오사카의 내 집 만들기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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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을 완공 예정인 감바 오사카의 신축 경기장 조감도 (사진=스타디움건설모금단체)
:: J리그 기행 (1) 감바 오사카는 어떻게 전용 구장을 만들었나?감바 오사카(이하 감바)는 한국의 축구 팬들에게도 친근한 J리그 클럽이다. 2000년대 들어 도약을 시작한 감바는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K리그 팀들과 자주 상대한다. 현재도 오재석이 뛰고 있고 조재진, 박동혁, 김승용, 이근호, 이승렬 등의 국가대표 선수들이 몸 담았었다. 리그 우승 2회, 일왕배 우승 3회, 리그컵 우승 2회 등 성적 면에서도 2000년대를 대표하는 J리그 클럽이라고 평가받는 감바는 2014년 트레블(리그, 일왕배, 리그컵)에 성공하며 구단 역사의 정점을 찍었다.
그런 감바의 유일한 문제는 경기장이었다. 최대 라이벌인 세레소 오사카를 비롯해 우라와 레즈, 가시마 앤틀러스, 요코하마 F. 마리노스, 나고야 그램퍼스 등 소위 말하는 A클래스 클럽들이 4만명 이상 수용 가능한 매머드급 경기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것과 달리 감바는 여전히 2만명을 수용하는 오사카 EXPO’70 스타디움을 쓰고 있다. EXPO’70 스타디움은 지난 1972년 오사카 만박기념공원 내에 세워진 종합운동장으로 그 동안 3번의 리노베이션을 거쳤지만 규모와 시설 수준에서 J리그 하위권 경기장으로 꼽힌다.
감바는 팀의 전신인 마츠시타 전산 축구팀 시절부터 30년 간 이 경기장을 써 왔지만 최근 들어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80%가 넘는 경기장 관중석 대비 평균 수용률을 기록했지만 원체 작은 규모 탓에 전체 관중 동원 수는 30만명에 그쳤다. 감바의 라이벌인 세레소에 몸을 담고 있는 김진현은 “감바의 팬 규모가 엄청나다. 오사카시에는 세레소 팬이 많지만 오사카부 전체를 따지면 감바 팬이 많다. 그래서 그 팬들을 홈구장이 다 수용 못한다. 오히려 우리 홈에서 경기를 하면 더 많이 온다”고 말할 정도였다.
작은 경기장이 팀의 규모와 재정 증가의 최대 장애물이 된다고 판단한 감바는 2008년 새로운 경기장 건설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당시 감바는 2005년 창단 후 첫 리그 우승에 성공한 뒤 꾸준히 관중 수가 증가했고 2007년에는 1만7,439명으로 87%가 넘는 수용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스타디움 츠쿠로(스타디움 만들자)’ 캠페인이다. 그리고 감바는 드디어 2015년 가을 새 경기장 완공을 앞두고 있다. 4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식 축구전용구장이다. 지난 4월 30일 감바의 클럽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바로 옆에 위치한 부지에서 축구전용구장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현재는 경기자 지붕을 덮는 공정이 진행 중이었다.
여기까지는 감바가 새 경기장을 만들게 된 계기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현실적 문제다. K리그 역시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전용구장을 갖길 원하는 곳이 많다. 의지는 있다. 하지만 재정 문제를 넘을 수 없다. 부지를 확보하고, 건설에 드는 비용을 충당할 엄청난 금액을 유럽처럼 구단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는 클럽은 K리그에 없다. 감바도 마찬가지였다. 연 예산이 우리 돈으로 300억원 수준인 감바가 1000억원이 훌쩍 넘는 경기장 건설 비용을 다 책임질 수 없었다. 그래서 K리그는 이 문제를 정치력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지자체장과의 긴밀한 협조 관계를 통해서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역효과도 일으킨다. 평균 1만명의 관중도 채우지 못하는 구단이 지자체의 퍼주기식 지원을 받아 전용구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세금 낭비라는 일반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과연 감바도 그렇게 했을까? 이것이 그들이 지난 7년 간 준비했고, 그 결실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새 홈구장 건설 프로젝트를 취재하고 싶어진 의욕의 출발이었다. 다행히 감바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숨김 없이 모두 공개해줬다. 7년 간 감바 구단에서 경기장 건설을 담당한 혼마 토모미 사업본부 주임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혼마 주임은 “이 경기장을 짓기까지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도움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J리그는 물론 K리그와 다른 나라에게도 말이죠”라고 말했다. 환경과 조건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이 인터뷰는 자신들만의 홈을 갖길 원하는, 그 과도기에서 가변석 열풍이 불고 있는 K리그에게 하나의 힌트이자 자극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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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바의 경기장 건설 담당인 혼마 토모미 주임. 그 뒤는 경기장 건설 캠페인 포스터 (사진=킥오프)
Q.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선 새로운 홈 구장을 건립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A. 지금 쓰고 있는 EXPO’70 스타디움이 J리그 클럽 라이선스에 부적합했기 때문입니다. 규모는 기준(1부 리그의 경우 1만5천명 이상)을 통과하지만 그 외의 시설이 확보되지 못했습니다. J리그로부터 현재 상태라면 클럽 라이선스를 받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또한 경기장이 너무 낙후돼 손님들의 불만족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해결 방안이 필요했는데 현재 경기장을 리노베이션 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경기장을 지을 것인가라는 고민 중 결국 새로 만들자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원래는 구단에서도 경기장을 짓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부담하기엔 너무 많은 돈이 들어서 도저히 무리라 판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연고지인 스이타시(감바는 오사카부의 스이타시를 연고로 한다)에 부탁했는데 당연히 돈이 없다고 거절을 당했습니다.(웃음) 기업들을 비롯한 여러 방면에 요청했는데 역시 다 거절 당했습니다. 그때 나온 해결책이 기부금입니다.
Q. 기부금으로 건설비용을 충당한다는 것은 쉽지 않을 텐데요? 행정적인 문제도 있지 않습니까?A. 2008년에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됐고 시의회에 그 안건을 내게 됐습니다. 행정적 통과에만 3년이 소요됐죠. 2011년 12월에야 스타디움 건립 허가가 의회에서 통과가 됐습니다. 2012년 3월부터는 기부금을 모아도 된다는 허가도 났습니다. 경기장 착공이 2013년 12월입니다. 2012년에 감바가 2부 리그로 강등이 됐을 때는 서포터들의 저항도 있었습니다. 경기장을 만들 바엔 그 돈으로 차라리 선수 영입을 하자는 목소리였습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선 경기장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Q. 근원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오사카 정도 규모의 지역이라면 당연히 축구전용구장이 있을 거라 봤습니다. 일본은 2002년에 한국과 함께 월드컵도 했잖습니까?A. 월드컵 당시에 오사카는 새로운 축구 전용 경기장이 건립되지 않았습니다. 나가이 경기장이 4만명 이상을 수용해 FIFA의 요건을 맞출 수 있으니까 거기서 경기를 해도 충분히 괜찮다고 했습니다. 결국 리노베이션을 하는 걸로 하고 오사카는 전용구장을 갖지 못하게 됐습니다.
Q. 총 건설비용은 어느 정도 들었고 그 금액은 어떤 식으로 조달했습니까? 
A. 140억엔을 목표로 기부금을 모았습니다. 3월 14일 기준으로 1억7,271만엔이 부족한 138억2,729만엔을 기부 받았습니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법인기부로 99억5019만엔입니다. 721개 법인기업이 기부를 했습니다. 파나소닉 등 구단 메인 스폰서의 지원도 있고, 지역사회의 작은 회사들의 지원도 있었습니다. 법인 기부는 최저 5만엔부터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개인 기부가 6억2,215만엔입니다. 총3만4,627명이 기부를 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감바의 팬과 스이타시와 오사카부의 지역민들이 낸 것입니다. 특히 감사한 것은 원정을 온 상대팀 패들도 기부금을 냈습니다. 2만명 정도가 EXPO’70 스타디움에 설치돼 있던 모금함에 익명으로 기부금을 넣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조성금(지원금)인데 이는 정부가 하고 있는 스포츠복표 수익 중 32억5,495억엔에 달합니다. 이 조성금은 환경을 해치지 않는 건축방식과 태양판넬을 통해 자가전력공급을 택했기 때문에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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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바는 외부에서 부품을 완성해 와 부지에 조립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낼 수 있었다 (사진=스타디움건설모금단체)
Q. 자연을 해치지 않는 건축방식이란 무엇입니까? 그런 것에 국가 지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택한 것인가요?A. 정부의 국토교통성이 그 부분에 지원을 합니다. 일단 신축 스타디움은 마치 레고 퍼즐처럼 공장에서 만들어 온 부품을 이 곳에 가져와 오직 조립을 합니다. 기존에는 자재를 세우고 콘크리트를 붓고 하는 식이죠. 이렇게 할 경우 불필요한 자재 낭비를 막고, 경기장으로 이동하는 무수한 트럭이 발생시키는 이산화탄소 수치로 낮출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조성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건 살입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도 그것이 가장 빠르게 건축할 수 있는 방식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가장 중점을 뒀습니다. 결국 많은 건설 방식을 제안했는데 허가를 받은 게 그 방식입니다.
Q. 부지 확보는 어떻게 했습니까?A. 원래 스이타시에 스타디움 건립을 얘기했을 때 어렵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지만이라도 제공해 달라고 했는데, 스이타시 내의 기존 유휴지 중 스타디움을 지을 부지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구단에서 고심해 보니 EXPO’70 스타디움 아래에 훈련장이 있는데 그건 오사카부의 부지였습니다. 그 곳이 괜찮지 않겠냐는 제안이 나와서 감바 오사카 구단과 오사카부, 스이타시가 함께 논의를 했고 경기장 부지로 쓰기로 최종 결정이 났습니다. 그 부지 비용에 대해서는 스이타시가 지불을 했습니다.
Q. 기부금으로 경기장을 짓기 때문에 재무의 투명성은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 같습니다.A. 스타디움 공식 홈페이지에 매일 들어온 기부금을 1엔 단위까지 기재합니다. 그 돈을 어떻게 썼는지에 대해서도 홈페이지에 조만간 공개할 예정입니다. 작은 공사를 맡는 회사까지도 다 공개 입찰을 시키고 결과 역시 공개를 합니다. 받는 모금에 대한 법인 이름은 내지 않습니다. 그건 모금에 응한 기업들이 원치를 않습니다. 주주들이 그것을 보면 기부한 데 대해 반발할 수 있고, 배당금이나 차라리 늘려달라고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큰 회사 몇 개만 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우도 익명 모금이 많아 모두 공개하기 어렵습니다.
Q. 기부에 응한 법인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없습니까?A. 기부금에 대해서는 어떤 혜택도 없습니다. 그 역시 법에 걸릴 수 있습니다. 수입에 관해서는 티켓, VIP 좌석 등을 준비 중이고 기타 부대 시설 운영 수익이 있을 것입니다. 그 부분은 전적으로 클럽의 수익입니다. 경기장 운영에 드는 비용은 기본적인 사용 요금 밖에는 없습니다.
Q. 곧 완공인데 경기장 소유 문제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한국은 기업이나 개인이 체육시설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에 지자체에 기부채납을 합니다.A.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입니다. 법인이나 개인이 경기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엄청난 건축물에 대한 세금이 굉장합니다. 완공 후에는 당연히 스이타시에 기부채납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감바 오사카가 지정관리자가 돼 운영권을 부여 받게 됩니다. 경기장 시설에 대한 활용은 기본적으로 구단의 계획대로 갑니다.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것을 스이타시도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국도 인천축구전용경기장과 광주챔피언스필드 등 근래 완공된 축구와 야구 전용구장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구단이 경기장 내 운영권을 가질 수 있다. 포항스틸야드, 광양축구전용구장은 기업이 만들어 지자체에 기부채납을 하고 시로부터 영구임대를 해 와 구단이 운영권을 가진 대표적 사례다.
Q. 감바 입장에서는 이 전용구장을 쓰는 것이 재정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가져온다고 봅니까?A. 현재 감바 오사카의 연간 경영 규모, 즉 예산은 30억엔 정도입니다. EXPO’70 스타디움은 2만석 수용 규모다 보니 팬들을 다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신축 스타디움은 4만명 규모인데 그 경우 수입 증대로 인해 구단의 예산이 50억엔 정도까지 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팬 서비스의 수준을 더 높일 수 있고 선수단와 아카데미 운영에도 더 투자를 할 수 있겠죠. 비용 부분은 훨씬 절감이 될 것이고요. 경제 효과는 10년간 960억엔으로 예측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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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바는 새 경기장을 지으면서도 대중교통 접근이 수월하지 않은 만박기념공원을 떠나지 않았다. 접근성을 위해 팀의 역사가 깃든 곳을 떠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진=스타디움건설모금단체)
Q. 이왕 새 경기장을 지을 거라면 조금이라도 더 시내 근처로 진입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오늘 취재를 위해 경기장으로 오는데 만박기념공원역은 시내와는 너무 거리가 있더군요. 한국에서는 경기장이 시가지와 멀어 관중이 찾지 않는다는 분석도 있습니다.A. 현재 일본은 어디를 봐도 시내 근처에 경기장을 지을 부지가 없습니다. 교통 면에서도 접근이 용이한 부지를 찾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감바는 1991년 이후 20년이 넘게 이 곳을 홈으로 사용해 왔습니다. 만박기념공원 안에 감바 오사카가 있다는 이미지가 그 오랜 시간 쌓였습니다. 굳이 접근성을 위해서 훨씬 더 많은 비용을 감수하면 옮겨야 한다는 의견은 없었습니다. 시내에서 거리가 멀어 팬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핑계라고 생각합니다. 방안은 충분히 존재합니다. 현재 경기장 옆에는 일본 최대의 부동산개발기업인 미츠이 후도산 그룹이 대형 쇼핑몰과 위락 시설을 만들고 있습니다. 원래 EXPO 놀이동산이 있었는데 이미 운영이 중단된 상황에서 그 부지를 활용하고 싶다고 오사카부가 생각했습니다. 그 요체가 우리의 새 스타디움과 미츠이 후도산의 쇼핑몰, 위락 시설이 됐습니다. 미츠이 그룹은 이미 일본 내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 쇼핑몰을 찾기 위해 손님이 찾아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오히려 우리 스타디움 입장에서 플러스 알파가 되는 거죠.
미츠이 후도산 그룹은 관서 지역 최대의 쇼핑몰 겸 위락시설을 건설 중이고 올 가을 개장할 예정이다. 이 곳에는 아쿠아리움, 포켓몬 체육관, 영어마을, 대형 극장, 테마파크, 쇼핑몰이 들어선다. 1970년 오사카 EXPO의 개최 이후 45년이 지나며 사람들이 찾지 않는 공간이 되던 만박기념공원은 감바의 새 스타디움과 미츠이 그룹의 위락시설로 인해 활력을 되찾게 됐다.
Q. 축구의 측면에서 새 스타디움의 자랑거리를 소개해주시겠습니까?A. 우선 그라운드와 관중석 사이의 거리가 매우 가깝습니다. 월드컵을 위해 건설된 우라와와 고베의 경기장은 안전 문제로 관중석이 좀 더 높은 위치에 있지만 우리는 유럽의 경기장들처럼 낮게 만들었으니까 경기를 더 가까이서,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유럽처럼 경기장의 4층은 모두가 VIP를 위한 스카이 박스석입니다. 총 1500석 규모입니다. 구단 재정에 큰 도움이 될 상품입니다. 또한 기존의 스타디움들은 지붕이 있지만 관중석 전체를 커버하진 못해 비를 맞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단 이 스타디움의 경우 100% 완비됩니다. ‘관중들을 위해서’가 최우선이죠. 스이타시 행정부에서 지었다면 아마 그런 축구 중심의 방향을 벗어났을 겁니다. 태양광발전 기능은 시합이 없을 때 클럽하우스와 연습장 등 다른 시설이 쓰는 전력량을 모두 대응할 수 있습니다. 다만 경기가 열릴 때 조명으로 들어오는 대용량의 전기는 태양광발전으로 부족해 그 부분만 외부에서 끌어와야 합니다.
Q. 이 질문이 제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입니다. 새 경기장이 굳이 필요한가를 축구계 밖에서도 인식을 하고 있습니까? 새 경기장의 가치가 축구 외적으로도 설득력을 가질 수 있나요?A. 지역 사회 입장에서는 손님이 배가 되니까 작게는 교통비에서 많게는 숙박비까지 경제 효과가 늘어나기 때문에 반가워 하고 있습니다. 스이타시 입장에서는 국제시합이 가능한 경기장을 확보하게 됐으니 스이타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릴 수 있습니다. 지역 사회의 주요 회의나 축제를 위한 장소도 제공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아마 한국과는 큰 관련이 없을 수 있는데 이 경기장은 지진 등 자연재해가 벌어졌을 때 긴급구호 피난소로도 활용할 수 있습니다. 고베와 오사카 지역에 대지진이 있었던 것이 불과 20년 전입니다. 만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 경기장은 즉각적으로 재해 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태양광 판넬을 이용해 전력 공급이 중단되어도 샤워실과 화장실을 쓸 수 있습니다. 1층 부분이 전부 주차장인데 전국에서 지원물품이 모일 때 창고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경기장 주변으로 주요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니까 여기에서 그 지원물품을 1차적으로 모아 오사카 시내 혹은 이바라키와 스이타로 가져갈 수 있는 중심 물류 센터로도 되겠죠. 그런 부분까지 고려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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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모금으로 건축 비용 대부분을 충당한 감바의 새 경기장은 2016년부터 사용된다. 그 경기장을 통해 팀의 예산은 2배 가까이 올라가고 지역사회 기여도 역시 높아진다. 새로운 시대의 초석을 닦은 것이다 (사진=스타디움건설모금단체)
Q. 마지막으로 최근 한국의 축구전용경기장들을 둘러싼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바로 콘서트와 같은 대형 공연 개최인데, 수익 창출을 위해 경기가 없는 날 콘서트가 벌어지는데 그 후폭풍이 큽니다. 감바는 새 경기장에서 콘서트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인가요?A. 무조건 배제할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축구전용경기장은 수용 규모 면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연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익은 경기장 운영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입니다. 최우선은 당연히 감바, J리그, 축구일 거고요. 콘서트를 하게 되면 잔디가 상하기 때문에 그것이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부분에 걱정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도 내부적으로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서호정의 킥오프] ACL 종합ㅣACL 조별리그 정복한 '메이드 인 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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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이 마지막에 조 2위를 확정하며 K리그 4팀은 모두 챔피언스리그 16강에 진출했다 (사진=프로축구연맹)
K리그와 한국 축구가 다시 한번 아시아 무대에서 ‘눈치 없이 너무 잘하며’ 큰 성과를 냈다. 6일로 조별리그 일정을 모두 마친 2015 AFC 챔피언스리그는 16강 진출팀을 모두 가려냈다. K리그는 대회에 참가한 4팀이 모두 조별리그를 통과했다. 조별리그에 4개 팀이 진출한 6개국(한국, 일본, 중국, 사우디 아라비아, 이란, 우즈베키스탄) 중 모두 16강에 오른 것은 한국의 K리그가 유일하다. 카타르와 UAE도 조별리그에 진출한 각 2개팀이 모두 16강에 올랐지만 그들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했던 참가팀도 있었다. 결국 플레이오프와 조별리그까지 모두 살폈을 때 단 1개팀도 낙오 없이 오른 것은 K리그가 유일하다. 한국 축구의 성과는 K리그에만 그치지 않았다. 중동에서 뛰며 이번 챔피언스리그에 참가한 5명의 선수(이정수, 곽태휘, 남태희, 이명주, 권경원)도 모두 소속팀의 16강 진출에 크게 일조를 했다.
K리그 4팀 중 가장 극적으로 16강에 오른 것은 FC서울이었다. 서울은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원정 경기에서 후반 추가 시간 터진 몰리나의 결승골로 웨스턴 시드니를 극적으로 따돌리며 H조 2위를 차지했다. 전북 현대는 홈에서 극강의 공격력을 다시 선보이며 산둥 뤼넝을 4-1로 대파, E조 2위를 결정지었다. 이미 5라운드를 마친 상황에서 16강 진출을 확정 지었던 수원 삼성과 성남FC는 마지막 경기에서 1위 등극을 노렸지만 승리하지 못하며 승자승 원칙에 의해 각 조 2위를 차지했다. 모두 조 2위를 기록한 탓에 K리그 4개 팀은 16강에서 서로 격돌하지 않게 됐다. 수원은 2013년 충격적인 패배를 안겨준 가시와 레이솔과 재대결을 한다. 전북은 데얀과 하대성이 있는 베이징 궈안과, 서울은 감바 오사카와 만난다. 시민구단 최초로 16강 진출의 역사를 쓴 성남은 아시아 최고의 부자 클럽인 광저우 에버그란데라는 큰 산을 넘기 위한 도전에 나선다.
한편 레퀴야 소속의 남태희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후 곤욕을 치렀다.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레퀴야의 승리와 조 1위에 의한 16강 진출을 이끈 남태희는 경기 후 상대팀인 알 나스르의 우루과이 출신 공격수 파비안 에스토야노프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관계자들의 저지로 심각한 사태는 막았지만 남태희는 안면에 상처를 입고 입 안이 터지는 부상을 입었다. 레퀴야의 미카엘 라우드럽 감독까지 달려와 남태희를 보호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알 나스르 경기 직후 구단주인 나스르 왕자의 명의로 된 발표로 구단 명예를 실추시킨 에스토야노프의 급여 50%를 삭감하며 후속 조치를 취하겠다고 발표했다. 레퀴야와 AFC도 이번 사건에 대한 논의를 할 예정이다.
:: 2015 AFC 챔피언스리그 16강 대진(왼쪽 팀 홈에서 1차전)알 사드(카타르, C조 2위)-레퀴야(카타르, A조 1위)
페르세폴리스(이란, A조 2위)-알 힐랄(사우디, C조 1위)
알 아흘리(UAE, D조 2위)-알 아인(UAE, B조 1위)
나프트 테흐란(이란, B조 2위)-알 아흘리(사우디, D조 1위)
수원 삼성(한국, G조 2위)-가시와 레이솔(일본, E조 1위)
전북 현대(한국, E조 2위)-베이징 궈안(중국, G조 1위)
FC 서울(한국, H조 2위)-감바 오사카(일본, F조 1위)
성남 FC(한국, F조 2위)-광저우 에버그란데(중국, H조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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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에서 서울 극장을 열며 극적으로 16강에 오른 서울 (사진=프로축구연맹 공동취재단)
동아시아: 한국 4, 중국 2, 일본 2동아시아에서는 다시 K리그가 주도권을 잡았다. 2010년 이후 5년 만에 4개팀 모두 16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맛봤다. 조 1위를 차지한 팀은 없었지만 전북, 수원, 성남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며 거의 격차를 주지 않았다. 중국 슈퍼리그는 초반 분위기를 이어가지 못한 채 광저우 에버그란데와 베이징만이 16강에 진출했다. 가장 실망스러운 것은 광저우 푸리였다. 원정으로 치른 첫 경기에서 감바를 잡으며 인상적인 행보를 걸었지만 부리람, 성남에게 연패를 당하며 전의를 잃었다. 마지막 경기에서는 부리람에게 0-5로 대패를 당하며 망신살을 뻗쳤다. 일본 J리그는 대회 초반의 위기를 극복하며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가시와를 제외한 나머지 팀들은 조별리그 3차전까지만 해도 탈락 위기였지만 감바와 가시마가 분전을 시작했다. 결국 감바가 극적으로 F조 1위를 차지하며 E조 1위 가시와와 함께 16강에 오르며 자존심을 챙겼다. 하지만 새 시즌 준비를 1월 말부터 하는 J리그의 특성 상 2월 말부터 돌입하는 대회 초반에는 어려움을 반복하는 상황을 타개할 조치가 필요하다는 데는 일본 축구 전체가 인식을 갖게 됐다.
지난 시즌 웨스턴 시드니 원더러스가 깜짝 우승을 차지하며 위력을 알렸던 호주 A리그는 조별리그에 참가한 2개 팀(웨스턴 시드니, 브리즈번 로어)이 모두 탈락하고 말았다. 샐러리캡으로 팀 재정을 컨트롤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태국 등 강력한 투자로 급성장한 리그와의 경쟁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실제로 A리그와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한 웨스턴 시드니와 브리즈번은 A리그에서도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기적적인 성과를 낸 지 1년 만에 다시 고민에 빠지게 된 A리그다. 신선한 돌풍을 일으켰던 태국의 부리람은 ‘승자승’이라는 조별리그 순위 결정 시스템의 최대 피해자가 되며 탈락했다. 챔피언스리그는 승점 동률 시 골득실이 아닌 동률 팀 간의 전적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승점 10점으로 감바, 성남과 동률이었던 부리람은 골득실에서 +5를 기록하고도 +3의 감바, +2의 성남과의 상대 전적에서 밀리며 탈락하고 말았다. 베트남의 빈즈엉 역시 홈에서는 만만치 않은 전력을 자랑하며 전북에 무승부, 가시와에 승리를 기록하며 대회를 마감했다.

추신수 MLB 일기 “벤치의 세심한 배려, 고마움과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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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레인저스 제프 배니스터 감독. ⓒ gettyimages/멀티비츠
오늘(20일) 같은 경기는 정말 할 말을 잃게 합니다. 경기가 1회말부터 0-2로 지고 있다가 3회초 7-2로 리드하는가 싶었더니 곧장 시애틀이 3점을 따라 붙어 7-5가 됐고, 6회초 우리가 3점을 보태 10-5로 앞서갈 때만 해도 남은 경기가 수월하게 풀려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7회말 시애틀이 1점을 추가, 10-6이 되더니, 8회말에는 3점을 보태 10-9 턱밑까지 추격전을 펼쳤습니다. 결국 9회말에 시애틀은 기어이 10-10 동점을 만들었고,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터진 넬슨 크루즈의 끝내기 안타로 우리는 10-11,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모처럼 타선이 활기를 찾으며 점수를 많이 뽑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마운드가 흔들리다 보니 일찍 쌓아 놓은 점수를 지키지 못하고 경기 내내 쫓기는 상황에서 결국엔 역전패로 끝나버린 부분은 선수들에게 적잖은 아쉬움을 안겨줬습니다. 다음 방문지가 애리조나. 오늘 점수를 끝까지 제대로 지켰더라면 애리조나로 향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웠을 텐데, 솔직히 그렇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등 부위 통증 이후 시즌 초반 조금씩 타격감이 올라오던 흐름이 잠시 주춤하고 있습니다. 통증 강도가 점차 사라지면서 곧장 경기에 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감독님이 보시기엔 제 상태가 온전치 않았다고 판단하셨나 봅니다. 휴식 차원에서 경기에서 빼거나 아니면 타순을 조정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지명타자로 경기에 내보내고 있으니까요.
선수 기용 여부는 감독님의 고유 권한입니다. 제가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쉬고 싶다고 쉴 수 있는 게 아닌, 전적으로 감독님의 판단 아래 결정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한창 타격감을 끌어올려야 하는 상황에서 휴식을 주거나 타순이 자주 바뀌는 건 적응면에서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물론 감독님도 저를 따로 불러 자신이 왜 그런 라인업을 짜고, 좌완 투수가 상대 선발로 나올 때 저를 왜 뺐는지, 그리고 왜 지명타자와 수비를 번갈아 맡기고 있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습니다. 감독님 말씀을 들으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팀을 이끄는 리더로선 지금 당장의 상황보다는 더 멀리, 예기치 않은 일에 미리 대비해야 하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준비해 나갈 때 선수 한두 명의 희생과 이해가 뒤따라야 하는 것이란 사실을요. 그것을 못 받아들인다고 하면 전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가슴과 머리로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데뷔 후 클리블랜드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러 감독님들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했습니다. 때로는 제가 그분들에게 실망을 드린 적도 있고, 어느 분은 제게 안타까움을 안겨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제 야구를 인정하고 존중해줬고 높이 평가했으며 그로 인해 서로 깊은 신뢰 속에서 시즌을 보내곤 했습니다.
전 지금의 배니스터 감독님과도 그런 신뢰가 형성돼 있다고 믿습니다. 감독님도 저를 믿기 때문에 어려운 부탁도 하시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까지 자세히 얘기해주시며 양해를 구하는 점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선수라면 어느 상황에 놓여도 최선을 다해 자기의 실력을 보여줘야 하는데, 전 아직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벤치에서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 쓰고 배려하다 보니 오히려 야구에만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인터뷰에서도 여러 번 밝혔듯이 전 어느 타순에 갖다 놔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할 겁니다. 실제 그렇게 하려고 노력 중이고요. 시즌 초반이고, 선수들의 타격감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은 이상 감독님의 라인업 변경은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저도 그 안에서 잘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방법도 찾고, 더 열심히 정답을 찾아가도록 해야겠죠.
그런데도 제 몸에선 혼자 휴식을 취하는 것보다 좌완이든, 우완이든 매일 경기에 출전해서 공도 고르고, 맞기도 하고, 삼진도 당하고, 안타도 치고, 홈런도 날리면서 몸으로 경기 감각을 익히는 걸 원합니다.

[이영미 人터뷰] 농구 꿈나무들의 ‘리틀 빅 히어로’ 천수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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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길 감독과 함께 사진 찍는 '글로벌프렌즈팀' 아이들.(사진=이영미)
오후 5시가 넘어가자 하나둘씩 아이들이 체육관으로 모여 들었다. 키가 큰 고등학생부터 유치원에 다닐 법한 어린아이까지 연령대가 제각각이었다. 생김새와 피부색에도 차이가 있었다. 한국말을 하지 않으면 외국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로 이뤄진 ‘글로벌 프렌즈’ 농구팀이었다. 눈이 유난히 맑은 한 남자 아이에게 다가가 농구가 재미있느냐고 물었다. 그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운동이 농구”라면서 “학교 수업보다 이 시간이 제일 기다려지고 즐겁다”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코치의 지도 아래 아이들은 팀을 이뤄 체력 훈련부터 게임까지 연령 구분 없이 뛰어다녔다. 농구를 통한 놀이에 더 중점을 두는 분위기였다. 여기저기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코치가 뛰라면 앉고, 공을 던지라면 갖고 도망 다니는 등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지만 코치도, 아이들도 웃느라 정신없다.
다문화가정 유소년 농구단 ‘글로벌 프렌즈팀’은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이태원초등학교와 토요일 여의도공원에서 농구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한국농구발전소 천수길 소장(감독)이 존재한다.
# 천수길 소장의 ‘딜레마’
배재고와 단국대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천 감독은 대한농구협회 홍보이사와 총무이사 등을 역임한 뒤 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한 농구인들과의 모임에서 농구를 통해 봉사하는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된다. 그때 뜻을 모은 농구인들이 한국농구발전연구소를 세웠고, 천수길 씨가 소장을 맡았다. 당시 한국농구발전연구소에 참여한 농구인들로는 최희암, 신선우, 이민현(조선대 농구부 감독) 등 전·현직 농구 감독들이 포함돼 있었다.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농구를 통해 꿈과 희망을 주고자 시작한 일이 지금에 이르렀는데, 천 소장은 기자에게 뜻밖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년 째 이 일을 해오고 있는데, 최근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그동안 농구인, 언론, 후원업체 등의 도움으로 힘들면서도, 보람된 일들을 진행해왔지만 상황이 호전되기 보단 자꾸 늪에 빠지는 것처럼 어려움이 많다. 집에서도 ‘이젠 그만하면 됐다’며 이 일에서 손 떼길 바란다. 하지만 날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만 둘 수도 없다. 계속 이어가자니 여러 가지 문제들이 쌓여있고, 그만두자니 아이들이 걸린다. 답답한 마음뿐이다.”
천 감독은 현재 ‘드림팀’과 ‘글로벌 프렌즈팀’을 맡고 있다. ‘드림팀’은 보육원 아이들이, ‘글로벌 프렌즈팀’은 다문화가정 아이들로 구성되었다. 한때 장애 어린이들을 위해 농구팀을 만들기도 했지만 운영 예산과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의 부족으로 안타깝게 팀을 해체했다고 한다.
‘농구로 꿈을 펼치겠다’ 해서 이름 지어진 ‘드림팀’은 그동안 유소년 농구에서 적잖은 돌풍을 일으키며 화제를 모았다. 2010년 제9회 국민생활체육 전국 유소년대회 저학년부, 서울 삼성썬더스배 초등부를 제패했고, 2012년에는 서울시와 전국 대회를 휩쓸며 주요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더욱이 드림팀 출신의 몇몇 아이들이 서울 시내 중학교 농구팀에 합격, 농구 꿈나무로 성장하게 된 부분은 다른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준 계기로 작용했다.
# ‘드림팀’, 폐교로 인해 농구단 해체 위기
이런 아이들에게 올해 큰 ‘사건’이 생겼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드림팀’ 아이들은 ‘소년의 집’에서 ‘알로이시오 초등학교’로 개명된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서울시 은평구 아동양육시설인 꿈나무마을 안에 있는 이 학교는 재단법인 마리아수녀회가 학교와 시설을 위탁 운영하고 있었는데, 위탁 아동 수가 줄고 관리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올해 2월 말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40년 만에 학교가 문을 닫자, 당장 ‘드림팀’ 아이들이 갈 곳이 없었다. 아이들 모두가 한 학교에 전학해서 농구팀을 유지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환경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손을 내민 학교가 있었다. 은평초등학교였다. 은평초등학교에선 ‘드림팀’ 아이들을 모두 받아줬고, 덕분에 학교 내에 ‘방과후 학교’로 농구팀이 신설됐다. 지도는 천수길 감독이 맡았다. 남자는 11명, 여자는 7명으로 구성됐고, 남자는 천 감독과 이강초 코치가 맡았지만, 문제는 여자 선수들을 가르칠 지도자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그때 떠오른 사람이 선일여고, 청소년국가대표 출신인 위명순 씨였다. 진심으로 고마웠던 건 내 전화를 받은 그가 잠시의 고민도 하지 않고 그 일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지금 은평초 여자 드림팀은 위명순 씨가 담당한다. 스포츠용품업체에서도 ‘드림팀’이 좋은 성적을 내니까 용품 후원에 나섰다. 코치도, 농구화, 농구공도 다 갖춰졌는데, 아이들이 마음껏 뛸 수 있는 체육관이 없다는 게 당면한 문제이다. 여자 ‘드림팀’은 키가 큰 아이들이 많아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환경만 조성되면 좋은 선수를 배출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맨땅에서 농구하는 건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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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즌 중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해 '농구교실'을 연 전태풍.(사진=연합뉴스)
# 전태풍, 문태종, 문태영도 재능 기부에 나서
분명 ‘한국인’이지만 유전에 의해 피부색이나 생김새가 다른 아이들은 평범한 보통의 한국 아이들과 ‘분류’돼 있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도 그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천 감독은 아이들이 ‘소외’의 세상으로 내몰리는 게 안타까웠다고 한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농구 교실을 만들기 위해 용인, 양지 등을 돌아다니다 서울 보광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학교에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은데, 학교에서 지원해 줄 테니 농구팀을 만들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방문하러 갔다가 커다란 운동장에 아무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앉아 땅바닥에 뭔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아이를 발견했다. 내가 다가가서 ‘집에 안가고 여기서 뭐 하고 있니?’라고 묻자 그 아이는 ‘집에 가도 엄마가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래서 그 학교에 ‘글로벌프렌즈팀’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보광초등학교에서 시작했다가 체육관 문제로 지금은 이태원초등학교로 옮겼다. 학교 구분 없이 여러 학교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농구교실을 찾는다.”
창단 초기에는 상명대 이상윤 감독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고 한다. 전태풍도 아내와 함께 보광초등학교를 방문, 농구 교실을 열고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H여행사에서 후원사로 나서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내면 외국 캠프나 대회에도 출전시켜줬다. H여행사에서 주최하는 농구대회가 생겼을 정도이다.
그러나 천 감독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나만 이 일을 해선 안 된다. 다문화가정 농구팀이 더 많이 늘어나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다들 재정적인 어려움에 하소연하며 농구팀 만드는 걸 꺼려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모두가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소외 계층의 아이들한테까지 신경 쓰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손을 놓아버리면 이 아이들은 말 그대로 소외 계층에 머무른다. 이 아이들도 한국인이고, 한국 사회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사회 공언을 앞세우는 기업이나 사회봉사단체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수차례 방문했지만, 회사 문턱 조차 넘기 어려웠다. 아예 담당자를 만날 수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국회를 찾아갔을까.”
평소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두고 있는 국회의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조금이라도 일이 수월하게 풀릴 수 있을까 싶어 찾아갔지만, 국회의원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간신히 비서관을 만나 하소연만 하고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 오바마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 이유
천 소장의 진짜 직업은 과일장사이다. 그동안 농구인, 후원 회사의 도움으로 농구팀을 운영했지만, 그들의 손길에만 의지하기엔 현실이 불안했다. 결국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인근에 과일가게를 열고 시간 날 때마다 그곳에서 과일을 팔았다. 그곳에서 나온 수익금은 대부분 ‘드림팀’과 ‘글로벌 프렌즈팀’ 운영비와 향후 체육관을 짓는 용도로 모으는 중이다.
“우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체육관이 없으니까 아이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줄 수가 없더라. 아이들은 농구를 많이 하고 싶어 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체육관을 빌려 쓰는 상황에서는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고 해서 틈틈이 돈을 모아 체육관 건립에 쓰려고 한다.”
그동안 ‘드림팀’과 ‘글로벌 프렌즈팀’은 다양한 도움의 손길 덕분에 팀이 유지될 수 있었다. 처음 뜻을 모은 최희암, 이민현, 신선우, 김진 등의 전·현직 감독들이 선뜻 후원금을 내주었고, 양동근, 전태풍, 문태영, 문태종 등은 비시즌 동안 일일교실을 열어 재능 기부를 실천하며 아이들에게 남다른 행복과 기쁨을 선사했다고 한다.
천 감독은 아이들을 위해 큰 용기를 냈던 일화를 들려줬다. 2009년 미국 오바마 대통령 방한 때 다문화가정 어린이들과 오바마 대통령이 함께 하는 ‘농구교실’을 추진하려 했다는 내용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아프리카 이민자로 태어나 사회적 냉대와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접한 농구를 통해 그 시간을 극복했다고 들었다. 그 얘기에 용기를 내 방한을 앞둔 오바마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지인의 도움으로 영어 편지를 완성해 백악관으로 보낸 것이다. 내용은 한국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농구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만약 대통령이 우리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아이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나로선 그 편지가 오바마 대통령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길이 없다. 백악관 비서실 참모진들이 회의를 열어 논의를 거듭하다가 막판에 보류했다는 내용을 워싱턴 주재 한국 기자가 기사를 쓰는 바람에 나까지 알게 됐다.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냥 외면할 수도 있는 편지였을 텐데, 미국 백악관에서 관심을 가져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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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암, 신선우, 이상윤 등 전현직 감독들의 재능 기부가 이어진 덕분에 아이들도 계속 농구공을 잡을 수 있었다.(사진=연합뉴스)
# 가족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가장
천 감독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치는 일에 푹 빠져 있는 그의 가정 생활이 실제론 어떠한지가.
“아내는 서울에서 이불 장사를 하고 있다. 지난해 내가 tvN 휴먼 다큐 ‘리틀빅히어로’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방송을 본 아내의 친구들이 이런 얘길 했다고 하더라. ‘넌 왜 그런 사람이랑 지금까지 살고 있느냐’라고. 과일 판매부터 주차요원, 식당 잡일까지 도맡아 하면서도 가정을 위한 돈벌이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돈벌이에 나서는 내가 그들 눈에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는 거고, 난 그런 그를 인정하고, 내가 돈 벌어서 가정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아내한테는 평생 미안한 마음뿐이다. 가족들 생각하면 난 지금이라도 이 일에서 손 떼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미안하다.”
천 감독은 자신을 지금까지 이끌어준 농구인의 이름을 거론했다. 최희암 전 전자랜드 감독이다. 나이 차이가 4살 밖에 안 나지만, 천 감독은 최 전 감독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최 전 감독은 한국농구발전소를 함께 설립하며 천 감독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천 감독과 함께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다 자신의 일을 위해 연구소를 떠났지만, 끊임없는 관심과 실질적인 도움을 주며 천 감독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돼주고 있다.
“처음에 뜻을 같이 했던 농구인들이 일 때문에 하나 둘씩 다 떠나고 나 혼자 남았을 때는 정말 외로웠다. 그때 옆에서 날 도와준 사람이 이강초 코치이다. 귀가 안 들리는 장애를 안고 있지만, 10년 째 나와 함께 이 일을 함께 해온 정말 고마운 후배이다.”
‘드림팀’과 ‘글로벌프렌즈팀’ 운영 내역은 매년 사회복지공동모금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후원사에선 한국농구발전소에 직접 돈을 전달하지 않고 사회복지공동모금에 기탁, 사회복지공동모금이 후원금을 관리하게끔 만들었다. 천 감독은 투명한 관리를 위해 이 방법을 채택했고, 지금까지 일체의 잡음 없이 두 팀을 이끌어왔다.
# 다문화가정을 돌보는 건 우리 사회 미래 위한 ‘투자’
천 감독에게 언제 가장 행복하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의 대부분은 농구보다 야구, 축구를 하고 싶어 한다. 야구, 축구부에서 탈락된 애들이 농구를 찾는다. 그런 애들로 구성된 팀이라 최고가 될 확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나 난 그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항상 최고’라고 말해준다. 가장 어려운 여건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농구를 하고 있고, 농구를 즐기고 있기 때문에 내 눈에는 그 아이들이 정말 최고로 보인다. 보육원,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나눔과 베품으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투자’의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아이들도 나중에 커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것이고, 그들이 받은 만큼 사회에 공헌하며 살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
최근 천 감독에게 도움을 자청하고 나선 이가 있다. 바로 농구 스타 방성윤이다. 방성윤은 지난해 11월부터 매주 ‘글로벌 프렌즈팀’을 맡아 고등부 학생들을 전담해 가르치고 있다. 지도자의 손길이 아쉬웠던 천 감독으로선 방성윤의 재능 기부가 엄청난 힘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인터뷰 초반에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고백했지만, 난 결국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10년을 버텨왔는데, 앞으로 10년을 더 못 버틸까 싶다. 그래도 많은 농구인들이 시간 날 때마다 도와주고 있어 큰 힘이 된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소외 계층의 아이들한테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결국 어른들이 다 안고 가야 할 부분 아닌가.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도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이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갈 만한 자신감과 희망으로 작용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시간 여의 훈련이 끝나자 체육관의 아이들이 천 감독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얼굴은 훈련으로 지친 기색 없이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천 감독의 입을 주시했다. 천 감독이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한다.
“요 녀석들, 선생님이 뭘 준비한 줄 아는 구나?” 그러자 그 중 체격이 가장 큰 아이가 이렇게 외쳤다. “감독님, 빨리요!” “알았어. 오늘은 그럼 햄버거 가게로 가서 마음껏 먹는 거야!”
드디어 원하던 대답을 들은 듯 아이들의 표정에는 생기가 흘러 넘쳤다. 천 감독의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아이들이 달려와 감독에게 안아달라고 말하고선 사진 찍을 포즈를 취한다.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줬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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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김새도, 연령대도 제각각이지만, 아이들은 농구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사진=이영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