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yernes, Mayo 22, 2015

[이영미 人터뷰] 농구 꿈나무들의 ‘리틀 빅 히어로’ 천수길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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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길 감독과 함께 사진 찍는 '글로벌프렌즈팀' 아이들.(사진=이영미)
오후 5시가 넘어가자 하나둘씩 아이들이 체육관으로 모여 들었다. 키가 큰 고등학생부터 유치원에 다닐 법한 어린아이까지 연령대가 제각각이었다. 생김새와 피부색에도 차이가 있었다. 한국말을 하지 않으면 외국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들 대부분은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했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로 이뤄진 ‘글로벌 프렌즈’ 농구팀이었다. 눈이 유난히 맑은 한 남자 아이에게 다가가 농구가 재미있느냐고 물었다. 그 아이는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운동이 농구”라면서 “학교 수업보다 이 시간이 제일 기다려지고 즐겁다”며 환한 웃음을 짓는다. 
코치의 지도 아래 아이들은 팀을 이뤄 체력 훈련부터 게임까지 연령 구분 없이 뛰어다녔다. 농구를 통한 놀이에 더 중점을 두는 분위기였다. 여기저기 아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코치가 뛰라면 앉고, 공을 던지라면 갖고 도망 다니는 등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지만 코치도, 아이들도 웃느라 정신없다.
다문화가정 유소년 농구단 ‘글로벌 프렌즈팀’은 매주 목요일 오후 5시 이태원초등학교와 토요일 여의도공원에서 농구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한국농구발전소 천수길 소장(감독)이 존재한다.
# 천수길 소장의 ‘딜레마’
배재고와 단국대에서 선수로 활약했던 천 감독은 대한농구협회 홍보이사와 총무이사 등을 역임한 뒤 사업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나 지인에게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한 농구인들과의 모임에서 농구를 통해 봉사하는 일에 대해 얘기를 나누게 된다. 그때 뜻을 모은 농구인들이 한국농구발전연구소를 세웠고, 천수길 씨가 소장을 맡았다. 당시 한국농구발전연구소에 참여한 농구인들로는 최희암, 신선우, 이민현(조선대 농구부 감독) 등 전·현직 농구 감독들이 포함돼 있었다. 우리 사회의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농구를 통해 꿈과 희망을 주고자 시작한 일이 지금에 이르렀는데, 천 소장은 기자에게 뜻밖의 얘기를 털어놓았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년 째 이 일을 해오고 있는데, 최근 심각한 딜레마에 빠졌다. 그동안 농구인, 언론, 후원업체 등의 도움으로 힘들면서도, 보람된 일들을 진행해왔지만 상황이 호전되기 보단 자꾸 늪에 빠지는 것처럼 어려움이 많다. 집에서도 ‘이젠 그만하면 됐다’며 이 일에서 손 떼길 바란다. 하지만 날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만 둘 수도 없다. 계속 이어가자니 여러 가지 문제들이 쌓여있고, 그만두자니 아이들이 걸린다. 답답한 마음뿐이다.”
천 감독은 현재 ‘드림팀’과 ‘글로벌 프렌즈팀’을 맡고 있다. ‘드림팀’은 보육원 아이들이, ‘글로벌 프렌즈팀’은 다문화가정 아이들로 구성되었다. 한때 장애 어린이들을 위해 농구팀을 만들기도 했지만 운영 예산과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의 부족으로 안타깝게 팀을 해체했다고 한다.
‘농구로 꿈을 펼치겠다’ 해서 이름 지어진 ‘드림팀’은 그동안 유소년 농구에서 적잖은 돌풍을 일으키며 화제를 모았다. 2010년 제9회 국민생활체육 전국 유소년대회 저학년부, 서울 삼성썬더스배 초등부를 제패했고, 2012년에는 서울시와 전국 대회를 휩쓸며 주요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더욱이 드림팀 출신의 몇몇 아이들이 서울 시내 중학교 농구팀에 합격, 농구 꿈나무로 성장하게 된 부분은 다른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심어준 계기로 작용했다.
# ‘드림팀’, 폐교로 인해 농구단 해체 위기
이런 아이들에게 올해 큰 ‘사건’이 생겼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드림팀’ 아이들은 ‘소년의 집’에서 ‘알로이시오 초등학교’로 개명된 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서울시 은평구 아동양육시설인 꿈나무마을 안에 있는 이 학교는 재단법인 마리아수녀회가 학교와 시설을 위탁 운영하고 있었는데, 위탁 아동 수가 줄고 관리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올해 2월 말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40년 만에 학교가 문을 닫자, 당장 ‘드림팀’ 아이들이 갈 곳이 없었다. 아이들 모두가 한 학교에 전학해서 농구팀을 유지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환경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손을 내민 학교가 있었다. 은평초등학교였다. 은평초등학교에선 ‘드림팀’ 아이들을 모두 받아줬고, 덕분에 학교 내에 ‘방과후 학교’로 농구팀이 신설됐다. 지도는 천수길 감독이 맡았다. 남자는 11명, 여자는 7명으로 구성됐고, 남자는 천 감독과 이강초 코치가 맡았지만, 문제는 여자 선수들을 가르칠 지도자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그때 떠오른 사람이 선일여고, 청소년국가대표 출신인 위명순 씨였다. 진심으로 고마웠던 건 내 전화를 받은 그가 잠시의 고민도 하지 않고 그 일을 맡았다는 사실이다. 지금 은평초 여자 드림팀은 위명순 씨가 담당한다. 스포츠용품업체에서도 ‘드림팀’이 좋은 성적을 내니까 용품 후원에 나섰다. 코치도, 농구화, 농구공도 다 갖춰졌는데, 아이들이 마음껏 뛸 수 있는 체육관이 없다는 게 당면한 문제이다. 여자 ‘드림팀’은 키가 큰 아이들이 많아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환경만 조성되면 좋은 선수를 배출할 수 있는 상황이다. 맨땅에서 농구하는 건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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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시즌 중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위해 '농구교실'을 연 전태풍.(사진=연합뉴스)
# 전태풍, 문태종, 문태영도 재능 기부에 나서
분명 ‘한국인’이지만 유전에 의해 피부색이나 생김새가 다른 아이들은 평범한 보통의 한국 아이들과 ‘분류’돼 있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은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도 그들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천 감독은 아이들이 ‘소외’의 세상으로 내몰리는 게 안타까웠다고 한다.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농구 교실을 만들기 위해 용인, 양지 등을 돌아다니다 서울 보광초등학교의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 학교에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은데, 학교에서 지원해 줄 테니 농구팀을 만들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방문하러 갔다가 커다란 운동장에 아무도 없이 혼자 덩그러니 앉아 땅바닥에 뭔가를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는 아이를 발견했다. 내가 다가가서 ‘집에 안가고 여기서 뭐 하고 있니?’라고 묻자 그 아이는 ‘집에 가도 엄마가 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그래서 그 학교에 ‘글로벌프렌즈팀’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보광초등학교에서 시작했다가 체육관 문제로 지금은 이태원초등학교로 옮겼다. 학교 구분 없이 여러 학교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농구교실을 찾는다.”
창단 초기에는 상명대 이상윤 감독이 자원봉사자로 나섰다고 한다. 전태풍도 아내와 함께 보광초등학교를 방문, 농구 교실을 열고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H여행사에서 후원사로 나서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내면 외국 캠프나 대회에도 출전시켜줬다. H여행사에서 주최하는 농구대회가 생겼을 정도이다.
그러나 천 감독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나만 이 일을 해선 안 된다. 다문화가정 농구팀이 더 많이 늘어나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다들 재정적인 어려움에 하소연하며 농구팀 만드는 걸 꺼려한다. 충분히 이해한다. 모두가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소외 계층의 아이들한테까지 신경 쓰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우리가 손을 놓아버리면 이 아이들은 말 그대로 소외 계층에 머무른다. 이 아이들도 한국인이고, 한국 사회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 사회 공언을 앞세우는 기업이나 사회봉사단체에 도움을 요청하고자 수차례 방문했지만, 회사 문턱 조차 넘기 어려웠다. 아예 담당자를 만날 수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국회를 찾아갔을까.”
평소 다문화가정에 관심을 두고 있는 국회의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조금이라도 일이 수월하게 풀릴 수 있을까 싶어 찾아갔지만, 국회의원 얼굴은 보지도 못했고, 간신히 비서관을 만나 하소연만 하고 돌아와야 했다고 한다.
# 오바마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 이유
천 소장의 진짜 직업은 과일장사이다. 그동안 농구인, 후원 회사의 도움으로 농구팀을 운영했지만, 그들의 손길에만 의지하기엔 현실이 불안했다. 결국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 인근에 과일가게를 열고 시간 날 때마다 그곳에서 과일을 팔았다. 그곳에서 나온 수익금은 대부분 ‘드림팀’과 ‘글로벌 프렌즈팀’ 운영비와 향후 체육관을 짓는 용도로 모으는 중이다.
“우리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체육관이 없으니까 아이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줄 수가 없더라. 아이들은 농구를 많이 하고 싶어 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체육관을 빌려 쓰는 상황에서는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없고 해서 틈틈이 돈을 모아 체육관 건립에 쓰려고 한다.”
그동안 ‘드림팀’과 ‘글로벌 프렌즈팀’은 다양한 도움의 손길 덕분에 팀이 유지될 수 있었다. 처음 뜻을 모은 최희암, 이민현, 신선우, 김진 등의 전·현직 감독들이 선뜻 후원금을 내주었고, 양동근, 전태풍, 문태영, 문태종 등은 비시즌 동안 일일교실을 열어 재능 기부를 실천하며 아이들에게 남다른 행복과 기쁨을 선사했다고 한다.
천 감독은 아이들을 위해 큰 용기를 냈던 일화를 들려줬다. 2009년 미국 오바마 대통령 방한 때 다문화가정 어린이들과 오바마 대통령이 함께 하는 ‘농구교실’을 추진하려 했다는 내용이다.
“오바마 대통령도 아프리카 이민자로 태어나 사회적 냉대와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접한 농구를 통해 그 시간을 극복했다고 들었다. 그 얘기에 용기를 내 방한을 앞둔 오바마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지인의 도움으로 영어 편지를 완성해 백악관으로 보낸 것이다. 내용은 한국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농구를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만약 대통령이 우리 아이들과 함께 농구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아이들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나로선 그 편지가 오바마 대통령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길이 없다. 백악관 비서실 참모진들이 회의를 열어 논의를 거듭하다가 막판에 보류했다는 내용을 워싱턴 주재 한국 기자가 기사를 쓰는 바람에 나까지 알게 됐다. 난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냥 외면할 수도 있는 편지였을 텐데, 미국 백악관에서 관심을 가져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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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희암, 신선우, 이상윤 등 전현직 감독들의 재능 기부가 이어진 덕분에 아이들도 계속 농구공을 잡을 수 있었다.(사진=연합뉴스)
# 가족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가장
천 감독의 얘기를 듣고 있다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농구를 가르치는 일에 푹 빠져 있는 그의 가정 생활이 실제론 어떠한지가.
“아내는 서울에서 이불 장사를 하고 있다. 지난해 내가 tvN 휴먼 다큐 ‘리틀빅히어로’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때 방송을 본 아내의 친구들이 이런 얘길 했다고 하더라. ‘넌 왜 그런 사람이랑 지금까지 살고 있느냐’라고. 과일 판매부터 주차요원, 식당 잡일까지 도맡아 하면서도 가정을 위한 돈벌이보다는 아이들을 위한 돈벌이에 나서는 내가 그들 눈에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는 거고, 난 그런 그를 인정하고, 내가 돈 벌어서 가정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라고. 아내한테는 평생 미안한 마음뿐이다. 가족들 생각하면 난 지금이라도 이 일에서 손 떼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미안하다.”
천 감독은 자신을 지금까지 이끌어준 농구인의 이름을 거론했다. 최희암 전 전자랜드 감독이다. 나이 차이가 4살 밖에 안 나지만, 천 감독은 최 전 감독을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최 전 감독은 한국농구발전소를 함께 설립하며 천 감독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천 감독과 함께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다 자신의 일을 위해 연구소를 떠났지만, 끊임없는 관심과 실질적인 도움을 주며 천 감독에게 든든한 지원군이 돼주고 있다.
“처음에 뜻을 같이 했던 농구인들이 일 때문에 하나 둘씩 다 떠나고 나 혼자 남았을 때는 정말 외로웠다. 그때 옆에서 날 도와준 사람이 이강초 코치이다. 귀가 안 들리는 장애를 안고 있지만, 10년 째 나와 함께 이 일을 함께 해온 정말 고마운 후배이다.”
‘드림팀’과 ‘글로벌프렌즈팀’ 운영 내역은 매년 사회복지공동모금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다. 후원사에선 한국농구발전소에 직접 돈을 전달하지 않고 사회복지공동모금에 기탁, 사회복지공동모금이 후원금을 관리하게끔 만들었다. 천 감독은 투명한 관리를 위해 이 방법을 채택했고, 지금까지 일체의 잡음 없이 두 팀을 이끌어왔다.
# 다문화가정을 돌보는 건 우리 사회 미래 위한 ‘투자’
천 감독에게 언제 가장 행복하느냐고 물었다.
“아이들의 대부분은 농구보다 야구, 축구를 하고 싶어 한다. 야구, 축구부에서 탈락된 애들이 농구를 찾는다. 그런 애들로 구성된 팀이라 최고가 될 확률은 현저히 떨어진다. 그러나 난 그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항상 최고’라고 말해준다. 가장 어려운 여건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농구를 하고 있고, 농구를 즐기고 있기 때문에 내 눈에는 그 아이들이 정말 최고로 보인다. 보육원, 다문화가정의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나눔과 베품으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투자’의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 아이들도 나중에 커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성장할 것이고, 그들이 받은 만큼 사회에 공헌하며 살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
최근 천 감독에게 도움을 자청하고 나선 이가 있다. 바로 농구 스타 방성윤이다. 방성윤은 지난해 11월부터 매주 ‘글로벌 프렌즈팀’을 맡아 고등부 학생들을 전담해 가르치고 있다. 지도자의 손길이 아쉬웠던 천 감독으로선 방성윤의 재능 기부가 엄청난 힘이 될 수밖에 없다.
“내가 인터뷰 초반에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고백했지만, 난 결국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10년을 버텨왔는데, 앞으로 10년을 더 못 버틸까 싶다. 그래도 많은 농구인들이 시간 날 때마다 도와주고 있어 큰 힘이 된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소외 계층의 아이들한테도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 결국 어른들이 다 안고 가야 할 부분 아닌가.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도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작은 관심과 배려가 이 아이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갈 만한 자신감과 희망으로 작용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2시간 여의 훈련이 끝나자 체육관의 아이들이 천 감독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얼굴은 훈련으로 지친 기색 없이 뭔가를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천 감독의 입을 주시했다. 천 감독이 미소를 띠며 이렇게 말한다.
“요 녀석들, 선생님이 뭘 준비한 줄 아는 구나?” 그러자 그 중 체격이 가장 큰 아이가 이렇게 외쳤다. “감독님, 빨리요!” “알았어. 오늘은 그럼 햄버거 가게로 가서 마음껏 먹는 거야!”
드디어 원하던 대답을 들은 듯 아이들의 표정에는 생기가 흘러 넘쳤다. 천 감독의 사진을 찍으려 하는데 아이들이 달려와 감독에게 안아달라고 말하고선 사진 찍을 포즈를 취한다.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줬다. 더없이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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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김새도, 연령대도 제각각이지만, 아이들은 농구로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사진=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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